천동성 전 교도관 19화 온정주의 교도관

수용자의 인간적 고뇌 함께해
온정주의의 다른 이름 ‘책임감’

후배들은 나를 온정주의 교도관이라고 불렀다. 단호하게 할 때는 칼같이 잘라내지만, 가능하면 앞뒤 상황을 살피고 대화를 먼저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범죄자가 된 경우도 보았고, 원칙만 고수하는 불합리한 구조와 행정으로 인생이 180도 바뀐 사람도 본 적 있다. 그러니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전후 사정을 보지 않고 단호하게만 대할 수는 없었다.


수용자 H는 초등학교 때 부모가 이혼하고 15살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어져 할머니 밑에서 동생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고등학교 중퇴 후 직장생활을 하던 중 여자문제로 친구와 다투고 살인을 저질러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내가 담당하던 집중근로 작업장은 일이 힘들긴 하지만 작업장려금이 월 30만 원 이상으로 다른 작업장에 비해 많아 장기수들이 선호하는 곳이었다. 작업자를 담당인 내가 신입수용자들 중 직접 선발해 오기도 했는데, 초범이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H가 눈에 띄었다. 나는 교대 시간에 미지정사동에 직접 가서 초범인 H를 면담하고 작업장으로 데려왔다. 어두운 구석이 있었지만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H는 힘든 일에 잘 적응했고 작업장려금이 모이면 할머니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 후 3년간 내가 다른 교도소로 전출을 가게 됐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H도 그중 한 명이었다. H는 다시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3년 사이에 H는 작업장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H가 근심 어린 얼굴로 상담을 요청했다. 나는 담당 직원이 아니었음에도 H는 나와 상담하기를 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꺼내놓기엔 어려운 얘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 후 시간을 내어 H를 찾아갔다.

 

근심거리가 있는 건지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묻자 H는 어렸을 때 H와 동생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현재 재혼한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지내고 있는데, 장애도 있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지도 못할 정도로 경제 사정이 안 좋다고 했다. 문제는 기초 수급자가 된 어머니를 친자인 H와 남동생에게 민법상 부양의무를 이행하라는 통지서가 왔다는 것이었다.


H는 어머니를 찾았다는 기쁨보다 교도소에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본인의 상황과 직장생활은 하지만 어머니를 부양할 형편은 안 되는 동생 걱정에 힘들어했다. 특히 본인보다 동생이 힘들어할 것이란 걱정이 컸다. 나는 H에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법 집행은 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를 징역을 살며 부양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H는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있었다.


며칠 뒤 눈에 띄게 체중이 불어난 H에게 혹시 건강에 문제가 생겼나 물어보았더니 정신과 약을 복용한 후부터 식욕이 늘고 운동량이 부족해 살이 쪘다고 했다. 나는 조절을 하라는 상투적인 말을 해주었지만 이곳저곳 아픈 곳투성인 녀석이 삶의 무게를 잘 견디어 내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나는 H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관심을 많이 쏟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다. 이 아이들도 정상적이고 사랑이 많은 가정에서 자랐다면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죄를 짓고 교도소에 와있다는 이유로 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나는 교정시설을 떠나왔지만, 후배 교도관 중 누군가가 내가 했던 역할을 해주며 H와 같은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지지를 해주고 있으리라 믿는다. 인간적인 관심을 갖는 일이 어려운 일이겠지만, 또 다른 온정주의 교도관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