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상처를 안고 다시 꿈꾸는 아이들

 내가 처음 천안소년교도소에 들어섰을 때, 이곳은 약 1,300명의 소년수용자와 SOFA 수용자, 미결 성인수, 공안사범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법적으로 소년수는 14~19세지만, 최대 23세까지 수용 가능해 겉모습만 보면 성인 같은 청년들이 많았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위압적인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교도소는 단순히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검정고시와 대입 준비, 자동차 정비 같은 직업훈련, 농악과 복싱을 배우는 충의대 활동, 그리고 위탁공장에서의 노동 등 변화와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소년수형자들은 결손가정 출신으로, 부모의 부재와 빈곤한 환경 속에서 범죄에 쉽게 노출된 아이들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과도한 형량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특히 접견 업무를 하며 마주한 이야기들은 나를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접견 연출 근무는 소년수들을 사동이나 공장에서 접견실까지 데려오고, 접견이 끝난 뒤 다시 데려다주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10여 분 동안 나누는 대화 속에는 무거운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느 날, 1공장에서 A라는 소년을 데리러 갔다. 하지만 그는 공장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내가 다그치자 A는 접견을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눈시울을 적시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에 만기출소인데, 징역 3년 사는 동안 처음 온 접견이에요. 그런데 어려서 절 버린 어머니가 왔다고요. 전 용서 못 해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어머니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거라며 설득했다. 결국 A는 형과 함께 온 어머니를 받아들였고 접견을 마쳤다. 공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어떤지 물었더니 A는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말대로 만나길 잘했어요.” 이유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유를 묻는 것은 필요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어머니란, 어쩌다 상처를 주었더라도, 지금이라도 찾아와 준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존재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A의 웃음에는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이 주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또 다른 날, 신입 소년수용자 한 명을 접견장에서 사동으로 데려가던 중 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요.”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두 분 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는 말에 놀라 더 물었고, 몇 년 전 덤프트럭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뉴스에서 부모님의 사진을 들고 있던 아이가 바로 내 앞의 소년수였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방황하다 결국 교도소에 오게 된 그의 삶이 안타까웠다.


천안소년교도소 아이들 중 80% 이상은 결손가정 출신이었다. 보육원에서 자라거나 빈곤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부모의 부재는 종종 그들을 범죄로 내몰았다.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안 돼 지나치게 무거운 형량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3천 원을 빼앗아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소년이나 억울하게 10년을 잃은 약촌오거리 사건의 최 모 군처럼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잘못 속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잃고 있었다.


소년교도소의 모든 이야기가 이렇게 슬프고 가슴 아픈 것만은 아니었다. 푸른 하늘 아래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소년수용자들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가족 합동 접견 행사. 수용자와 가족들이 함께 돗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나누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날이었다. 보통은 칸막이 너머로 짧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접견실이 전부였지만, 이날만큼은 조금 다른 시간을 허용했다.


우리 교도관들은 그날 수용자 K의 특별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K는 출역 중인 소년수였고,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질 예정인 듯했다. 수용자들이 삼삼오오 가족을 만나는 가운데, 휠체어를 탄 아주머니와 수녀님, 그리고 음식을 들고 있는 한 여성이 잔디밭으로 들어왔다. 순간, K가 달려 나갔다.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를 본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어머니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주며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시 몇 년 만에 만난 아들이 반가운 듯, K의 손을 힘겹게 잡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뇌성마비로 꽃동네에 거주하던 K의 어머니를 위해 정만곤 교위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정 교위는 K를 상담하며 그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알게 되었다. K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서로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4년째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뇌성마비로 꽃동네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정 교위는 꽃동네를 방문해 어머니를 직접 만났다. 전화조차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정 교위는 두 사람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하며, 어머니와 K의 마음을 전하고받아 끊어진 가족의 연결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마침내 어머니가 K를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정 교위는 가족 합동 접견을 마련했다. 그날 K는 몇 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고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는 그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헤어지는 순간, 어머니는 수녀님과 정 교위를 향해 힘겹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 ~ ~ 마 ~ ~ 워 ~ ~ 요.” 이 사건은 교도소 내에서도 큰 감동을 주었다. 이후 K는 배관과 정보처리 자격증을 취득해 출소 후 남쪽 지방 공단에 취직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퇴직 후 문득 그 시절이 떠오른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출소 후, 세상에 나가 너희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쯤 너희도 40대가 되어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가족과 함께 웃고, 일상을 지켜내며,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있기를 바란다. 어디에 있든, 어떤 삶을 살든, 나는 여전히 너희를 응원한다.
너희와 함께 했던 교도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