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명동성당 성물방 건물에서 사목국장 신부님과 마주하고 있었다. 손에는 내가 며칠 밤낮을 고민하며 준비한 신학교 입학원서가 들려 있었다. 내가 품어온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부님, 입시 요강 어디에도 그런 기준은 없습니다. 접수받으신 후 버리셔도 좋으니 접수는 받아주십시오.”
신부님은 원서를 가져가라고 하시며 끝내 내 원서를 받지 않으셨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느님께서 날 시험하고 계신 걸까?”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신부님, 저도 압니다. 제 부족함을요. 하지만 우리 본당 신학생이 그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올해 신학교에 부르실지 모른다’고요.
하지만 신부님은 끝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져가세요. 원서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참고 있었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성당 안은 고요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 상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제 잘못입니까, 주님? 제 부족함이 너무 큰 탓입니까?” 신부님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그의 차가운 태도가 자꾸만 마음을 후벼 팠다. 성당에서 평생 배운 신앙은 사랑과 이해를 가르쳤는데, 오늘의 일은 그 모든 것과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다.
그해, 신학교는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당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합격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지만, 내가 원서를 제출하지도 못했다는 말을 하자 모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놀란 반응은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신부님, 왜 제게 그토록 냉정하셨습니까?”그 의문은 결국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길을 잃었다. 신부가 되겠다는 오랜 꿈을 잃고 난 뒤, 내 삶은 한동안 부유하듯 흘러갔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 했지만 목표를 잃은 나는 금세 좌절했다. 대신 기계공장, 인쇄소, 책 대여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아갔다.
1986년 군대에 입대했지만, 제대 후에도 삶의 방향은 여전히 막막했다. 정읍으로 내려가 양계장을 도왔고, 1988년엔 전주교도소 교정직 9급 시험에 도전했다. 그러나 또다시 불합격의 통보를 받았다. 그 즈음 어머니께서 뇌종양 수술을 받으셨고, 가족에게 닥친 불운들은 나를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속으로 밀어넣었다.삶에 대한 희망마저 바닥을 드러낼 때쯤, 당시 원주교도소에서 근무하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교도관 시험이 있어. 다시 한번 도전해보는 게 어때?”
그 말은 내게 하나의 작은 빛과도 같았다. 하지만 시험일은 하필이면 여동생의 결혼식과 겹쳤다. 망설이는 나를 보고 여동생이 말했다.
“오빠, 결혼식보다 직장이 우선이야. 나야 상관없으니까 꼭 시험 보러 가." 결국, 합격을 하고 1992년 1월. 나는 천안소년교도소 교도관으로 임용되었다.
교도관 임용 후 첫 출근길,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아침이었다. 천안 소년교도소. 내가 앞으로 일하게 될 곳. 교도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날이라 그런지 마음이 설레면서도 묘하게 불안했다. “교도관이라니...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혼잣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출입문을 지나 처음 본 교도소는 삭막했다. 높은 철문과 철조망, 그리고 차가운 공기. 새벽녘의 고요함 속에서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데도 내 발걸음은 묵직했다.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교도관이 된 것은 그런 나의 간절함이 담긴 선택이었다. "취사장 배치입니다. 아침 취사 보조 근무, 바로 시작하세요."
입사 첫날이었지만 인사는 간단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취사장으로 안내받았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취사장 안에서 음식 준비를 하던 선배 교도관이 나를 보고 힐끔 웃었다. 곧이어 선배가 내게 첫마디를 건넸다.
"여긴 뭐하러 왔시유? 빨리 공부해서 나가유.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나가야지. 우린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유."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축하의 말도, 격려의 말도 아닌 이런 냉소적인 첫인사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취사장 한쪽으로 가버렸다.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선배의 말 속에 담긴 뼈아픈 진심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처음으로 마주한 수형자들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그들은 내 또래 친구들처럼 보였지만, 얼굴엔 나이에 맞지 않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취사장에서 일을 돕던 한 아이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하는 일 힘들지 않니?” 그 아이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힘든 거야 뭐 늘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는 밥이라도 먹을 수 있잖아요. 밖에서는 그게 어려웠거든요.”
그 대답은 나를 벼락처럼 강타했다. “여기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괜찮다”는 말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절실한 의미였을까.
퇴근길, 선배의 냉소와 아이의 대답이 묘하게 겹쳤다. 이곳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기도했다.
“하느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제가 이 아이들에게, 그리고 이곳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기도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른 것은 예전에 품었던 신부의 꿈이었다. 나는 신부가 되지 못했지만, 여기서 또 다른 방식으로 치셤 신부처럼 누군가를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날, 나는 다짐했다. “이곳에서 내 길을 찾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