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통신금융사기와 자금세탁 사건의 어려움은 범죄 구조가 이미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전기통신을 이용한 기망, 계좌 이동, 인출·전달, 조직적 지시 체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의 기능만 수행돼도 전체 범죄가 작동한다. 따라서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죄 전모를 인식했는지보다 범행 구조 내에서 어떤 기능을 실질적으로 수행했는지, 그리고 그 기능이 범죄 실행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우선적으로 판단한다. 최근 전기통신금융사기의 범주는 전통적 보이스피싱을 넘어 주식 리딩방 투자 권유, 로맨스 스캠, 가짜 투자 사이트, 메신저 피싱 등 다양한 방식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판례가 확장되고 있다. 법원은 구체적 기망 내용보다 ‘통신을 이용한 기망 및 송금 유도 구조’인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자금세탁 또한 이 범죄 구조의 핵심 기능으로 보아 엄중하게 평가된다. 계좌 양도나 인출·송금 등 자금 이동을 담당한 경우, 법원은 이를 ‘범죄 완성을 위한 실질적 기능 수행’으로 판단 하고, 단순 계좌 제공만으로도 범죄 인식 가능성을 추정 하는 경우가 많다. 입출금 패턴이 비정상적이면 ‘몰랐다’ 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필요한 전략은 피고인의
성범죄 사건을 맡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속도’다. 사건은 빠르게 굳어지고, 한번 굳어진 인상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객관적 물증이 부족한 경우에는 진술이 전부인 경우가 많고, 그 진술이 곧 사건의 프레임이 된다. 그 프레임이 사실관계의 촘촘한 확인보다 ‘분위기’와 ‘감정’쪽으로 먼저 달려갈때 문제가 생긴다. 변호사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무조건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이 사실과 정합적인지, 법이 요구하는 요건을 충족하는지, ‘증명’의 기준에 따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번 사건도 출발할 당시에는 당사자 간 진술이 엇갈리는 ‘진술 대 진술’ 상황이었다. 의뢰인은 캠프에서 알게 된 여성과 술 을 마신 뒤, 피해자가 만취해 항거불능 상태에 이르렀음을 이용해 간음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 공소사실의 요지는 이렇다. 의뢰인이 피해자를 방으로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침대에 눕히고 성적 행위를 시도했으며, 잠에서 깬 피해자가 이를 거부해 준강간 미수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피해자 진술을 무조건 거짓으로 치부하며 부정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변호인의 역할은 그 사이에서
<더시사법률>을 구독하고 계신 독자들로부터 마약 사건과 관련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변호사님, 제 사건은 마약의 양이 너무 많아서 이미 끝난 것 아닌가요?”라는 질문이다. 특히 마약의 무게가 쟁점이 되는 사건에 연루된 이들일수록 이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수사기록에 적힌 수치, 압수조서에 기재된 무게, 감정서에 등장하는 숫자 하나만을 보고 이미 결론이 정해졌다고 체념해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마약 사건을 오랜 시간 다뤄온 실무자의 입장 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마약 사건은 숫자 하나만으로는 절대 결과를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 상당 기간 마약 사건을 전담해 왔고, 마약 분야 공인전문검사 자격을 취득한 이후에는 관련 사건을 지속적으로 다뤄왔다.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마약 사건은 여전히 주요 한 필자의 업무 영역 중 하나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마약 사건에서 핵심은 ‘얼마나 많은 양이 나왔느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무게가 어떤 과정과 기준을 통해 산출됐는지, 그리고 그 수치가 피의자의 실제 행위와 어
의뢰인들과 상담하다 보면 이전에 선임했던 변호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1심 변호사가 제대로 준비를 안 해준 것 같아요”, “변호사가 제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어요”와 같은 하소연들이다. 항소심을 준비하는 의뢰인이라면 변호사에 대한 절박함은 남다르다. 상고(3심)는 법률 위반이나 중대한 절차 위반 등 제한적인 경우에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항소심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피고인들이 변호사 선임 과정에서, 그리고 선임 이후 변호사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들이 있다. 내 사건에 대해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좋은 변호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변호사와 어떻게 협력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형사 절차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피고인과 검사의 대등한 지위 보장 그리고 판사를 설득할 서면의 작성이 그것이다. 형사재판, 특히 항소심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수사 기록과 공판 기록을 손에 쥔 검사와의 펜싱 경기와 같다. 유리한 무기를 손에 쥔 검사와의 대결에서 법률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대등하게 싸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는 검사의 손에 쥐여있는
2017년 ‘미투 운동’이 계기가 되어 형성된 ‘성인지 감수성’ 법리는 우리나라 성범죄 판단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대표적으로 대법원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특수성·맥락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사회구조와 성별 권력관계, 2차 피해 위험 등을 고려해야 한다” 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이후 하급심 역시 이러한 판단 기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또 다른 양상을 보게 되었 다. 성인지 감수성은 본래 실제 피해가 존재함에도 ‘증거 부족’ 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지 못하던 사각지대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리였다. 그런데 이 법리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과 도한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향으 로 오남용되면서, 의도치 않게 무고한 가해자가 양산되는 부 작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기억의 단편화, 트라우마로 인한 시기 혼동, 진술 과정의 왜곡 등 다양한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완벽하게 일관된 진술’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나는 여러 사건에서 피해자가 겪는 이러한 현실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일관성 결여의 원인이 ‘트라우마 때문인지’, ‘허위신고 때문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이 명확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전기통신금융사기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반복되는 금융사기 피해를 억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전기통신금융사기 범행이 점점 조직화·전문화되면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역할과 책임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강화되는 추세다. 과거에는 범죄 조직과의 직접 접촉 여부나 금전적 이익의 취득 여부 등이 중심적 판단 요소였지만, 최근에는 자금 전달책이나 단순 심부름 단계의 말단 피고인조차 범죄 구조에 기능적으로 기여했다고 보아 공동정범으로 인정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광범 위한 사회적 피해를 차단하기 위한 정책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흐름이지만, 한편으로는 피고인의 실제 인식과 판단 능력이 충분히 평가되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실무에서 두드러지는 변화는 낮아진 고의 판단의 문턱이다. 전기통신금융사기 사건에서 고의 판단은 더 이상 피고인이 범죄 조직과 어떤 방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범행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 당시 정황을 통해 피고인이 불법성을 미필적으로라도 인식할 수 있었는지가 핵심 기준으로 작용한다. 반복적인 인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독립몰수제 도입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독립몰수제란 유죄 판결 여부와 무관하게 특정 재산이 범죄 수익으로 확인될 경우, 별도의 절차를 통해 이를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쉽게 말해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환수와 같이 극히 예외적인 사안에서 논의되던 방식을 일반 형사사건 전반으로 확대하자는 구상이다. 범인의 사망이나 도피로 공소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도 범죄 수익은 반드시 환수해 야 한다는 논리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 필자는 최근 여러 언론을 통해 독립몰수제가 지닌 위헌 성과 구조적 부작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얼핏 보면 이 제도는 장기간의 수사와 재판 절차 속에서 고통받는 피해자들 에게 즉각적인 해결책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형사 사법 체계 전반에 적지 않은 혼란 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범죄 수익이 제3자에게 귀속된 경우, 국가가 그의 악의를 입증해야만 해당 범죄 수익을 환수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확립된 법리다. 만약 독립몰수제를 이유로 제3자가 선의임에도 국가가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예외를 신설한다면, 이는 민사법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로 이
형사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1심 선고 직후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판결이 내려지고 나서야 비로소 “내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될 줄 몰랐다”며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은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억울함, 후회, 불안, 그리고 ‘이제 끝난 걸까’ 하는 절망이 뒤섞인 얼굴들이다. 그러나 형사사건을 오래 다루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형사사건은 1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판결 직후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항소심은 단순한 재검토 절차가 아니다. 기존 판단의 타당성만을 되짚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와 변화된 태도를 바탕으로 사건을 다시 구성하는 재판이다. 1심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이유의 상당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심에서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절차가 항소심이다. 그러나 항소심은 시간을 되돌리는 재판이 아니다.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를 제출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항소심은 1심이 어떠한 논리와 근거로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최근 국회를 통과한 형법 개정안은 사기죄, 컴퓨터등사용 사기죄, 준사기죄의 법정형을 기존 징역 10년에서 최대 20년, 가중 시 징역 30년까지 가능하도록 크게 상향했다.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투자리딩방 등 불특정 다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조직형 사기 범죄에 강화된 처벌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형량 인상이라는 조치가 실제 사기 범죄를 줄이는 효과로 이어질지는 별도의 문제다. 형사사법 현장에서 수많은 사기 사건을 다뤄본 변호사의 시각에서 보면, 이번 개정은 분명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중요한 한계도 드러낸다. 무엇보다 형량을 높이는 것만으로 범죄가 감소한 사례는 거의 없다. 사람은 범행을 저지르기 전 형량을 정교하게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은 '나는 안 잡힐 것'이라는 심리에 기반해 행동한다. 충동적 범행이나 조직적 지시에 따른 범죄에서는 형량 자체가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더 흔하다. 범죄 심리 연 구에서도 ‘처벌의 엄격함(severity)’보다 ‘처벌의 확실성(certainty)’이 행동 억제에 훨씬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해 왔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사기 구조의 특성이다. 최근 캄보디아 등 해외에 본거지를 둔
조진웅 배우가 소년범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마녀사냥과 다름없는 여론 몰이를 보면서 사람들은 왜 이리도 가혹하고 세상은 왜 이토록 냉정한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나는 1992년 1월 당시 천안소년교도소(현재는 ‘천안교도소’)에 9급 교도관으로 임용되면서 교도관 생활을 시작해, 30년 중 17년을 소년수용자들과 함께 보냈다. 소년교도소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소년수들의 상처받고 비뚤어진 마음을 다독였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의 성직자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교화·개선을 도모하고, 심리치료·음악치료·미술치료 전문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소년수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교정기관에서도 수용자들의 재범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당시 천안교도소에는 지역 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매주 교도소를 방문해 소년수들의 연극 지도를 하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성껏 연극반 수용자들을 지도해 천안시민회관에서 공연을 열기도 했다. 연극을 통해 소년 수용자들의 마음을 치료했던 조동희 교수님의 이야기다. 그의 소탈한 성격과 인자한 웃음을 통해 많은 소년수들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