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민 [박세희 변호사의 법조인 칼럼] 사랑인 줄 알았던 관계의 배신 성범죄로 몰고갔지만 무혐의로

요즘 성 관련 사건을 보면, 무엇이 진심인지 모르겠다. 정말 사랑한 것인지, 일방적인 것인지, 상대방이 의사를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원한 것인지. 너무도 많은 다양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마다 실체와 내용, 결론은 달랐다. 한 마디로 ‘케.바.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나를 찾아온 의뢰인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였다. 사건은 간단했다. “원장님이 프로포폴까지 놓고 강제로 나를 범했어요”가 신고 내용으로 전형적인 강간, 강제추행으로 피고소 당한 사건이었다.


성형외과 원장이었던 그는 좁은 진료실이 내 세상의 전부이고 그 안에서 행복해하는, 세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저 출퇴근만 열심히 하는 40대 초반의 의사였다. 그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러했다. 의뢰인의 병원에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여성이 있었는데, 여성이 먼저 유혹해 왔고 사귀자고 한 것도, 프로포폴을 놔 달라고 조른 것도 여성이 먼저였다고 했다. 의뢰인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면서도 사랑한다고 하고, 좀 무섭긴 했지만 의뢰인 역시 그 여성을 사랑했다고 했다.


그의 말은 절실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눌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말을 신뢰해야 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 회의실을 나가면 전 당신 편으로 당신을 위해 싸울 겁니다.

 

하지만 우리 둘이 있을 때는 제가 당신의 적인 것처럼 사실을 파고들 것이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서운해하지 마세요. 당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렇습니다.”


많은 의뢰인이 나의 이런 태도에 서운해한다. 맞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의뢰인의 감정도 보듬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17년 이상 변호사로 일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했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안아주는 것이 아직 서툴다. 몇 년 전 상담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는데도 그렇다.


억울해하는 의뢰인의 마음을 푸근하게 품어주지는 못했지만, 사건 해결은 깔끔하고 확실하게 해야 했다. 일단 증거를 모았다. 알고 보니 의뢰인을 고소한 여성은 정식 상담실장도 아니었다.

 

병원의 다른 직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병원에 애인으로 오기 시작하다가 언젠가부터 아내인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CCTV는 남아 있지 않았고, 의뢰인과 여성이 주고받은 문자는 남아 있었다. “오빠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남아 있는 녹취 파일도 찾았다. 나는 증거들을 차분히 다 수집했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 같았다.


그렇다면 고소를 결심한 그 순간은 여성이 원하지 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일까? 이 경우엔 피해 일시와 장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앞뒤의 정황, 대화 내용, 그 이후의 대화 내용과 태도 등을 재구성해야 한다.

 

나는 다음 날의 피해자의 감정, 표현, 태도 그리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날짜별로 모든 문자, 녹음 내용, 행동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조사를 받는 동안 의뢰인은 여전히 감정적이고 흥분한 상태여서 내가 직접 여러 변소를 하고 그동안 준비한 이야기들을 했다. “원칙으로 갑시다 수사관님. 강제성이 있다는 증거가 엄격하게 증명되나요?”

 

우리의 주장에 수사관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다음날 영장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른 증거도 없이 왜 신청을 하느냐는 우리의 항의에도 수사관은 사안의 중대성을 들었다. 피의자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피해자의 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장은 기각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추가 조사와 영장 신청이 반복됐다. 결국 3회에 걸친 영장 신청과 기각 끝에 최종적으로 무혐의 불기소처분 결정서를 받았다.


나는 무혐의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수 차례의 영장신청을 막지 못하고 담당 수사관을 설득하지 못해 의뢰인을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할 뿐이다. 열 사람의 범인을 못 잡는 것,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이 안 생기는 것. 이 중 선택을 해야 한다면 후자를 선택하라고 수업시간에 배웠다.

 

무고한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제도와 절차가 잘못된 것이 맞다. 우리는 단 한 명의 무고한 이가 생기지 않도록 싸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