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천 냥 빚 (경북북부 제1교도소)

 

누구나 어려웠던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시절, 우리
집도 풍파를 비켜가지 못했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
다. 한 지방 대학에 합격한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고,
아빠는 일을 하러 일본으로 떠났다. 엄마는 이것저것 가
리지 않고 일을 다녔다.


엄마가 보내주는 용돈은 아무리 아껴 써도 금방 바닥났
다. 학교생활은 과 대표를 맡을 만큼 적극적이고 재밌게
했다.


하지만 지방대에 다닌다는 열등감이 나를 붙잡았다. ‘더
열심히 공부할걸’ 미련 속에서 1학기를 마치고 집에 올라
왔다.


6월의 초여름, 느즈막한 시간에 한 친구가 날 찾아왔다.
나와 같이 미술학원을 다닌 친구는 좋은 대학에 진학한
후 그 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내게 말했다.


“입시 다시 해보는 건 어때?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입시를 또 하라고? 그것도 반수를? 난 자신 없어.”


그렇게 돌아섰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침 아빠도 일을 마
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참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엄마, 아빠에게 무거운 마음을 털
어놓았다.


“너는 너밖에 모르니?”


“아직도 미술학원비가 80만 원이나 밀려 있어.”


같은 말이 돌아왔다. 하지만 아빠는 나의 마음만큼을 받
아줬다.


“정 하고 싶으면 한 번 해봐. 대신 학원비는 내줄
수 없을 것 같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는데, 네가 사정을 잘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천 냥 빚’은 아빠의 단골 멘트였다. 초라한 모
습으로 출신 학원에 찾아가고 싶진 않았지
만,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원장님
을 찾아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원장님과 눈을 맞춘 순간이었다.


“나도 네가 잘 풀리지 않아 항상 마음에 걸
렸어. 잘 생각했다. 이 반년이 앞으로 너의
인생을 바꿔 놓을 거야.”


나는 대학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아침에는
도서관, 저녁에는 미술학원에 갔다. 나를 돕
겠다던 친구도 그 말을 지켰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나는 주변의 도움으로 도전
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다른
걱정은 할 겨를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오로지 나를 믿어준 부모님과 친구, 원장님에게 보답하
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수능을 치렀다. 고3 때와 비교해 무려 100
점이나 올랐다. 그렇게 원하던 학교에 합격증을 거머쥐
었다.


학원에서도 기뻐하며 고등학교 1학년 수업을 봐달라는
제안까지 했다.


합격한 것도 모자라 학원 강사까지 되다니, 모든 일이 꿈
만 같았다.


첫 출근 날, 엄마는 80만 원이 든 봉투를 가지고 학원에
찾아왔다.


너무 늦게 줘서 죄송하고 감사하다면서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도 고개 숙여 마음을 전했다.


그날 친구가 찾아온 건 행운이었고, 나를 믿어준 부모님
은 사랑이었으며, 나를 도와준 원장님은 축복이었다. 스
스로를 도운 나는 최고였다.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