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전을 받았다. 아침부터 미지정 사동에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미지정 사동을 담당할 때 데리고 있던 30대 후반의 J였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수용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던 J가 싸움을, 그것도 아버지뻘 되는 수용자 C와 싸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있었고 C가 J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한마디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말에 J가 C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J답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J가 아버지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가 보육원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C가 며칠 전에도 J에게 “너 보육원 출신이냐?”고 물어봐 기분이 나쁘던 차에 애비 없는 자식 소리까지 나오자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J의 이름을 부르며 “너 답지 않게 왜 그랬어?” 라고 물어보자 눈물을 왈칵 쏟는다. J가 사과를 하고 싶다 하고 C 역시 자식뻘 되는 놈 처벌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나는 팀장의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J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J는 몇 년 전 출소했다가 올해 초 재범으로 재입소했는데, 누범으로 형도 많이 받은 상태였다. 부모 잘 만나서 좋은 가정에서 자랐다면 교도소에 오지 않았을 아이였다. 그만큼 수용 생활을 모범적으로 잘했고, 늘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던 아이였다. 나조차도 J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은 몰랐었다. 때로는 품어주고 때로는 바로잡아줄 아버지가 J에겐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애석했다.
물론 훌륭한 아버지를 두고도 교도소에 오는 사람들도 있다. 교도관 생활을 마무리하는 날 내게 특별히 인사를 건네온 수용자 K의 경우가 그렇다. 나는 병환 중인 아내를 돌보기 위해 정년보다 1년 일찍 교도관 생활을 마감해야 했는데, 마지막 출근 날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똑같은 일과를 보내며 마무리하자 싶었다. 수용자들이 출역하면서 인원점검을 시작했고 그때 12작업장 담당 직원이 갑자기 “계장님 오늘 마지막 점검이시다”라며 나의 마지막 출근을 알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수용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계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눈물이 울컥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고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쫓아와 내 손을 잡고 감사했다는 말을 건넸다. 40대 초반의 수용자 K였다. K는 내가 수시로 상담해주며 징벌을 받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했는데 그 인연으로 내게 고마움을 표현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K가 기억에 남는 건 70대 후반의 어르신이었던 그의 아버지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소장님께 편지를 보내왔고 보안과장을 통해 관할팀장인 내게 전달되었다.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입양해 데려와 아내가 낳은 것처럼 해서 키운 아이입니다. 소중하게 가슴으로 키운 아이인데 어느 순간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 결국 교도소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아이인데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가게 되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부디 제 아들이 훌륭한 분들과 상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자식 사랑이 어찌나 애절했는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내용이었다. K는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편지에 쓰인 부탁대로 어르신께는 잘 이끌어주겠다는 말을 전했다.
교도소 안에도 누군가의 아버지가 있다. D 소에서 내가 상담하던 수용자 P는 13살이었던 딸을 성폭행했던 범인을 살해하고 15년의 징역형을 받아 4년째 수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표정이 좋지 않기에 이유를 물어보니 가족들의 상황이 문제였다. 아내는 수술한 허리가 잘못되어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딸은 아버지의 얼굴 보기를 어려워했다. 게다가 부모님은 병환 중이라 접견을 하러 오는 것 자체가 불가했다.
P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얼굴이라도 뵈야 한다며 부모님 댁 근처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을 부탁했다. 나는 방법을 찾아내어 그의 바람대로 이송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뿌듯함도 잠시, 이송된 교도소에서 P의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은 오죽이나 걱정할까 싶었다. 그래도 가족과 연락이 이어지고 있는 건 다행이었다.
몸이 아픈 수용자에게 연락되는 가족마저 없다면 교도관 입장에서도 난감한 일이다. 말기암으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수용자의 형집행정지가 결정되어 가족 인계가 필요했는데, 연락되는 가족이 없어 수소문을 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어렵게 30대의 딸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본인도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고 아버지를 24년 전에 본 게 마지막이란 말에 인계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딸은 말기암의 아버지를 인계받았다. 그래도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인데 남은 생을 고통스럽지 않게 모셨다가 임종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눈물 나는 마음씨였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교도소엔 오지 않았을 J와 훌륭한 아버지를 뒀음에도 교도소에 들어온 K, 그리고 딸을 지키려다 교도소에 온 아버지 P, 말기암의 수용자와 그 딸까지. 우리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했던 사람들 덕분에 나 스스로 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해오며 살아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