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편작의 큰형님과 같은 교도관이 될 수 있다면

원칙적인 직원과 어머니의 눈물
교도관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문제가 생기기 전에 다가가야…
수용자들의 변화 이끌 수 있어

 

D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몇 년 전, 외정문에서 접견을 기다리는 한 부부를 보게 되었다.


“제발 사정 좀 봐주세요, 여기 신분증을 찍은 사진이라도 낼게요”
“안됩니다. 돌아가세요.”


멀리 부산에서 아들을 보러 온 부부였는데, 하필 어머니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아 외정문 근무자에게 사정을 하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몇 번 접견을 온 적 있었고, 신분증을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근무자는 원칙을 내세울 뿐 요지부동이었다.

 

평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원칙대로 일하는 강성 근무자라 아무래도 어렵겠다 싶어 나 역시 지나가려는데, 부부가 내게 달려와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도저히 그 눈물을 외면할 수 없어 부부를 모시고 민원실로 향했다.


“계장님! 이러시면 안 되죠! 민원실에서도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쩌려고 이러세요? ”


외정문 근무자는 밖으로 나와 내게 따지기 시작했다. 그의 격렬한 항의에 부부의 얼굴은 다시 잿빛으로 변했다. 나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한 뒤 부부를 민원실로 모시고 갔다.

 

알고 보니 신분증 없이는 안 된다고 했던 민원실의 대답은 아직 일이 미숙한 직원의 잘못된 안내였다. 역시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접견 잘하고 가시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일을 하다 보면 경직되고 답답한 행정을 하는 후배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때마다 공무원은 상황에 맞게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국민에게 봉사하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원칙만을 내세우며 비상식적인 행정을 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교도관이라고 해서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교도소에서 벌어지는 문제 중 상당수는 교도관이 만든다.”

 


퇴직을 1년 앞둔 선배가 이 말을 했을 때 솔직히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특히나 정신질환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이상행동을 하며 난동을 부릴 때는 저들이 문제지 교도관인 우리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도관에 따라 수용자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교도관이 강하게 억누르며 제압하려 하면 극도로 흥분하며 공격성을 보이지만,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 안정되고 차분해지는 것이다.


내가 미지정 사동 담당으로 있을 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난폭한 수용자들과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해주고, 다리가 아플 정도로 돌아다니며 알아보려 했던 나의 태도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전국시대의 명의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는 전설적인 의학자인데, 그의 두 형도 모두 훌륭한 의사였다고 한다. 하루는 위나라의 임금이 삼 형제 중 누가 가장 명의인가를 물었다.


그때 편작은 자신의 큰 형님을 가리키며, 환자가 병이 나기 전에 미리 알고 치료한다고 임금께 고했다.

 

교도관도 마찬가지다. 큰 사고가 터지기 전에 수용자들과 신뢰를 쌓고 문제를 예방하는 교도관이 있는 반면, 일이 벌어진 후에야 나서는 교도관도 있다. 외국인 교도소에서 국적이 다른 수용자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나는 통역 수용자를 선정해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게 했다.

 

그 결과, 단순한 통역을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조언이 오가게 됐고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D 교도소에서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며 징벌을 수차례 받았던 수용자 세 명이 천안교도소에서는 조용히 잘 지내고 있기에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내가 D 교도소 근무 당시 3천 명이 넘는 수용자에 사형수 10여 명, 120명이 넘는 무기수에 전국구 문제수들이 많아 교도관들이 수용자들과 절제된 대화를 하며 차단하였지만,

 

천안에서는 교도관들이 수용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수용자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상담을 잘 해주는 등 수용자를 끌어안고 가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것이 수용자들의 공격적인 행동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 근무하다가 마치 친정과도 같은 천안 교도소로 돌아왔을 때, 수용자 운동장에서 몇 년 전 내가 담당했던 수용자들을 다시 만났다. 그중 한 명,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수용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10살 무렵에 어머니가 살인죄를 저질러 무기징역을 받고 20년 넘게 여자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30대 중반의 수용자였는데, 다른 교도소에서 몇 번 상담을 해주며 얼굴을 익혔는데 뜻밖에도 천안에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는 말이 마음을 훅 하고 파고들었다.


“계장님, 천안은 참 이상한 곳이에요, 제가 세 번이나 사고를 쳤는데 세 번 다 훈계를 받았어요.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건으로 금치 25일을 받았거든요. 미안해서 잘 살기로 했어요”


이곳이 다른 곳과 달리 수용자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 잘해주려는 걸 이들도 알고 있던 것이다.

 

이처럼 교도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고, 교도관들의 태도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오랜 교도소 생활을 통해 몸으로 익혔다. 편작의 큰형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수용자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교도관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