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소년원에서 청송교도소까지, K의 교도소 인생

 

 

대전교도소에서 야간 2팀 부당직 업무를 볼 때였다. 부당직은 새벽 2시에 당직을 교대해 아침 6시까지 소 전체를 책임지는 일을 한 다. 그날 새벽 5시쯤이었다. 60여 명이 3,200 여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취사장에서 약간 의 소란이 일어난 듯했다. 가석방 특혜 등의 인센티브를 주기도 할 정도로 한여름의 취 사장 출역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간간이 출역을 거부하는 수용자들도 있다.

 

그날은 수용자 A와 반장 사이에 일이 있는 듯했다. A가 작업거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반장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계속 출역을 거 부하고 혼자 조사실에 간다니 A를 조사수용 시키라며 남 일 이야기하듯 말했다. 나는 다 툼을 한 사람을 같이 보내야 하니 데리고 오 라고 했다. 그제야 반장은 머뭇거리며 두 사 람을 화해시키겠다고 했다.

 

수용자를 조사수용 시키는 일은 교도관 입장에서 시간 낭비도 줄이고 일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나는 그 방 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힘든 출 역을 한다는 건 가석방 출소를 기대한다는 것 일 텐데, 이번 일로 징벌을 받으면 그 혜 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A가 마음을 잡고 취사장 일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온 소내가 술렁 거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취사장이 었다. 개봉하지 않은 담배 몇 갑이 취사장 한 구석에서 발견된 것이다. 알고 보니 취사장 에서 나오는 잔밥을 가져가는 업자가 담배 를 넣어줬고 이것을 받은 수용자가 새 장화 에 넣어 숨겨둔 것이 발각된 것이다. 담배를 발견하고 신고를 한 인물이 바로 A였다. 동 료와 다투고 출역거부를 하던 그가 어느덧 성실하고 믿음직한 수용자가 되어있던 것 이다. 출역 거부 건으로 A를 조사수용을 하 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만약 그랬다면 A는 취사장에 적응을 못 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담배가 발 각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조사방은 수용자들의 의욕을 꺾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 절망감까지 안겨 교도 소에 적응하기를 방해하는 곳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는 수용자들을 그곳으로 보내 지 않으려 했었다. 20대 중반이었던 현식(가 명)이의 경우도 그랬다. 현식이는 182cm의 키에 온몸에 문신이 뒤덮여 있어 조직폭력 배처럼 보였지만 눈망울이 선한 게 평소 말 도 없고 성실한 수용자였다. 어느 날 현식이 와 같은 작업장에 있는 40대 Y가 현식이가 자신에게 욕을 한다고 처리해 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현식이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Y가 자신을 조사방에 보내려고 작 업을 친다는 소문을 듣고 화가 났던 것이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뻘 되는 사람 한테 욕을 하면 되겠느냐고 현식이를 좋게 타일렀다. 그날 이후 현식이를 다시 만난 곳 은 교도소 내 천주교 교회당이었다. 종교 행 사에는 전혀 참석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어 쩐 일인지 와있던 것이다. 어떤 종교든 관심 을 갖고 행사에 온다는 건 교화의 시작이고,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일 수 있었다. 나는 출 소일이 얼마 남지 않은 현식이가 건강한 사 회인으로 돌아가 다시는 교도소에 오지 않 기를 기도했다.

 

교도관으로 오래 근무하다 보면 자꾸만 이 곳으로 되돌아오는 수용자들도 만난다. K 처럼 말이다. K처럼 평생 교도소를 제 집 드 나들 듯 사는 사람들을 선배들은 ‘교도소형 인간’이라고 불렀다.

“제가 징역 산 걸로 따지면 교정계 역사입 니다. 소년원에서 청송까지 보호감호도 살 았잖아요.”

 

60대 후반의 수용자 K는 병원 침대에 누워 서도 입담이 여전했다. 대퇴부 골절로 외부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는데, 간도 안 좋고 대 장에도 이상이 있어 어디서부터 치료를 시 작해야 할지 난감한 상태였다. 어려서부터 소년원에 들락거리기 시작해 성인 교도소 까지 수용되기 시작했고, 출소 후 얼마 지나 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탓에 보호감호형도 선고받았던 K였다. 오죽하면 연고지 교도 소에 수용될 때마다 교도관들이 ”또 들어왔 어?“라고 인사를 할 정도였을까. K가 마지 막으로 출소했을 때 분명 장사를 한다는 소 식이 들려왔는데 이렇게 온몸이 망가진 상 태로 다시 누워있을 줄은 몰랐다.

 

“다시는 안 들어오려고 했는데 창피해 죽 겠시유” K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출소 후 붕어빵 장사로 건강하게 살아보려 던 그의 노력은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 로 물거품이 되었다. 아내는 가출했고, 하나 있던 아들은 아내의 가출 후 극단적 선택을 해 돌봐줄 가족도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 교 도소를 들락거리던 K는 결국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기거할 곳으로 교도소를 ‘선택’ 한 것 으로 보였다. 무기수가 아님에도 소년원에 서 소년교도소, 성인 교도소에서 청송교도 소 그리고 보호감호까지 40년을 넘게 대한 민국 교도소의 역사와 함께 한 K. 교도소에 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그를 생각하자 니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K에게는 교도소가 유일하게 자신을 보 살펴주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수용 자들의 교정과 교화를 담당하고 돕는 직업 교도관으로서 그를 대했지만, 속으로는 생 의 마지막을 코앞에 두고 침상에 누워있는 K의 고단하고 불행했던 삶에 작은 위로를 건넸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