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사 응급환자 발생! 의료과로 이동 중!” 다급한 무전 소리에 나는 한달음에 의료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수용자 L이 피투성이가 된 발뒤꿈치를 붙잡고 누워있었다. 아킬레스건을 끊으려고 한 모양이다. 수용자 L은 교도소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그는 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다. 젊을 땐 정보공개 청구와 인권위 진정으로 직원들과 부딪혔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해를 서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자 더 이상 그의 행동에 반응해 주는 이도 드물었다. 특히나 L이 수용되어 있는 교도소에 사형수와 무기수, 거물급 수용자들이 많아 그의 존재감은 점점 묻혀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벌인 소동도 관심을 끌어보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타교도소에 근무하는 교도관 친구가 내게 그의 과거사를 전달하며 신경 좀 써달라 부탁해왔다. 교도소에서 나이가 들어버린 L은 가족도 없고 건강도 나빠져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파손된 안경으로 인해 가까이하던 신문과 성경조차 읽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답답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수용자 L이 결국 선택한 건 자해였다. 그가 선택한 자해라는 방식은 오히려 모든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지만 앞으로도 긴 시간을
미지정 사동은 교도소 안에서도 가장 험난한 곳으로 악명이 높다. ‘험지 중 험지’로 불리며 교도소 직원이라면 다들 고개를 흔들며 피하려 한다. 이해는 된다. 이곳엔 규율을 상습적으로 어기거나 정신적인 문제로 단체생활이 어렵거나, 신체적으로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통제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게다가 이곳 수용자들 중 절반 이상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라 사람들이 더 예민한 상태다. 오늘도 나는 이 험지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다들 미지정 사동을 꺼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바람에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만큼 인간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깊이 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지정 사동에서 근무했던 시절은 아득히 멀어졌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몇 사람이 있다. “주임님, 제 얘기 좀 들어주십쇼…” 어느 날 아침, 한 노인 수용자가 나를 찾았다. 늘 그렇듯 바쁜 아침이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뭔가 무겁고 오래된 사연이 느껴졌다. 직업군인으로 퇴직한 노인은 매달 군인연금 300만 원이 꾸준히 나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교도소에 들어온 후부터 연금은 부인에
1992년, 소년수형자들과 함께 했던 생활을 마무리하고 총무과로 이동하게 되었다. 새롭게 담당한 업무는 영치품 업무였다. 영치 업무는 단순한 듯 보이지만 꼼꼼함과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업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보안과장이 나를 불렀다. “SOFA 수용자를 영치 청소부로 데리고 있을 수 있겠나?” 나는 뜻밖의 제안에 당황해 물었다. “제가 영어도 못 하는데, 미국인 수용자들을 어떻게 데리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한국어를 잘하니까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을 거야. 지금 SOFA 수용자 10명이 공장에도 출역하지 않고 사동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래서 공장으로 보내려 했는데, 굿리치와 램지라는 두 명이 영치 청소부로 일하고 싶다고 하더군. 너도 영치 업무가 많으니 데리고 일해봐.” 그렇게 해서 나는 SOFA 수용자 굿리치와 램지, 그리고 한국인 수용자 한 명을 영치 청소부로 데리고 다니며 일을 하게 되었다. 굿리치와 램지는 시작부터 내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특히 자신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점에 대해선 거침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따졌다. 서로가 낯선 가운데 교도관과 수용자라는 관계도 있어서 처음부터 좋은 팀워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처음 천안소년교도소에 들어섰을 때, 이곳은 약 1,300명의 소년수용자와 SOFA 수용자, 미결 성인수, 공안사범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법적으로 소년수는 14~19세지만, 최대 23세까지 수용 가능해 겉모습만 보면 성인 같은 청년들이 많았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위압적인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교도소는 단순히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검정고시와 대입 준비, 자동차 정비 같은 직업훈련, 농악과 복싱을 배우는 충의대 활동, 그리고 위탁공장에서의 노동 등 변화와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소년수형자들은 결손가정 출신으로, 부모의 부재와 빈곤한 환경 속에서 범죄에 쉽게 노출된 아이들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과도한 형량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특히 접견 업무를 하며 마주한 이야기들은 나를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접견 연출 근무는 소년수들을 사동이나 공장에서 접견실까지 데려오고, 접견이 끝난 뒤 다시 데려다주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10여 분 동안 나누는 대화 속에는 무거운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느 날, 1공장에서 A라는 소년을 데리러 갔다. 하지만 그는
1982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명동성당 성물방 건물에서 사목국장 신부님과 마주하고 있었다. 손에는 내가 며칠 밤낮을 고민하며 준비한 신학교 입학원서가 들려 있었다. 내가 품어온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부님, 입시 요강 어디에도 그런 기준은 없습니다. 접수받으신 후 버리셔도 좋으니 접수는 받아주십시오.” 신부님은 원서를 가져가라고 하시며 끝내 내 원서를 받지 않으셨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느님께서 날 시험하고 계신 걸까?”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신부님, 저도 압니다. 제 부족함을요. 하지만 우리 본당 신학생이 그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올해 신학교에 부르실지 모른다’고요. 하지만 신부님은 끝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져가세요. 원서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참고 있었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성당 안은 고요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 상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제 잘못입니까, 주님? 제 부족함이 너무 큰 탓입니까?” 신부님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그의 차가운 태도가 자꾸만 마음을 후벼 팠다. 성당에서 평생 배운